Medicine Story
생리의학스토리
1930
난이도 : 초급
ABO혈액형의 비밀 : 수혈의 역사
(수혈의 역사)
관련연도: 1930년
필자 : 김혜연, 배애님 박사

15세기에 연대기 기록자였던 스테파노 인페수라(Stefano Infessura)에 의해 최초의 수혈이 시행됐다는 보고가 있었다. 1492년 교황 이노첸시오 8세(Pope Innocent VIII)가 뇌사 상태에 빠지자 내과의사의 제안에 따라 소년 세 명의 혈액을 죽어가는 교황의 입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는 혈액의 순환이나 혈관을 통한 수혈의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런 무모한 시도가 행해진 것이다. 당시 소년들의 나이는 10살이었고 교황에게 그들의 피를 주는 대신 금화를 받기로 약속 받았다. 그러나 소년들의 피를 받은 교황은 사망했고 피를 준 소년들 역시 모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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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혈의 역사: 동물혈액을 인체에 주입하면서 시작된 혈액의 연구

 

인류 최초의 수혈 시도에 관한 보고

15세기에 연대기 기록자였던 스테파노 인페수라(Stefano Infessura)에 의해 최초의 수혈이 시행됐다는 보고가 있었다. 1492년 교황 이노첸시오 8세(Pope Innocent VIII)가 뇌사 상태에 빠지자 내과의사의 제안에 따라 소년 세 명의 혈액을 죽어가는 교황의 입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는 혈액의 순환이나 혈관을 통한 수혈의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런 무모한 시도가 행해진 것이다. 당시 소년들의 나이는 10살이었고 교황에게 그들의 피를 주는 대신 금화를 받기로 약속 받았다. 그러나 소년들의 피를 받은 교황은 사망했고 피를 준 소년들 역시 모두 사망했다.
몇몇 카톨릭교회 관련 작가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교황 정치에 반대하는 인페수라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그의 기록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새 카톨릭 사전(New Catholic Dictionary)에서 그의 기록에 관해 언급한 부분인데, 그들은 인페수라의 기록에 객관성이 전혀 없으며, 악의적이고 말도 안되는 로마 사회의 가십거리에 대한 편파적인 기록이라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Stefano_Infessura http://www.news-medical.net/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License)
 

1600-1700년대, 혈액의 초기 연구

1628년, 영국인 의사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가 몸속에서 혈액의 순환에 대해 밝혀냈고 자세한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논문 제목: An Anatomical Exercise on the Motion of the Heart and Blood in Animals). 하비에 의해 혈액 순환의 개념이 정립되면서 더욱 정교하게 수혈에 관한 연구가 시작 됐다고 볼 수 있는데, 이 개념이 정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수혈이 시도되었다.


  • 그림) William Harvey Illustration of William Harvey’s experiments (출처. © National (Public domain. Freely licensed media files)
    Portrait Gallery, London)

1658년, 네덜란드의 생물학자인 동시에 현미경학자인 얀 수밤메르담(Jan Swammerdam)이 적혈구를 발견, 보고 했다. 그는 처음으로 해부한 조직을 현미경으로 관찰 했으며 그의 기술들은 이후 수백 년 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665년, 영국에서 첫 번째 공식적인 수혈이 진행되는데, 의사인 리처드 로워(Richard Lower)가 개들 간의 수혈을 성공시켰고 이 결과를 통해 동물의 혈액을 다른 동물에게 수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 그림)Jan Swammerdam Richard Lower
    (Public domain. Freely licensed media file)

1667년, 영국의 리차드 로워(Richard Lower)와 에드먼드 킹(Edmond King)은 수혈에 관한 공동연구를 진행하여 양의 혈액을 정신 이상 증상을 보이는 사람에게 성공적으로 수혈을 했다고 보고했다. 로워는 건강한 혈액을 주입해 주거나 오래된 혈액을 제거하는 것으로 아픈 사람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당시, 수혈을 받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한 괴짜 학자인 어써 코가(Arthur Coga)가 수혈에 동의하여 로워와 킹에 의해 양의 혈액을 이용한 수혈이 진행됐다.

그림) Jean-Baptiste Denis
(Public domain. Freely licensed media file)

같은 해,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주치의였던 쟝-밥티스트 데니스(Jean-Baptiste Denis) 역시 사람 혈액의 수혈을 처음으로 입증 했다고 보고된 인물이다. 1667년 6월 15일, 발열을 동반한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15살의 소년에게 데니는 약 12온스의 양의 혈액을 주입했고, 수혈을 마친 데니스는 “소년의 무기력증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살이 통통하게 올랐으며 그를 알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라고 했다. 데니스의 두 번째 수혈 대상자는 건강한 45세의 의자 배달원이었고 그 역시 양의 혈액을 받았으며 그 이후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두 건의 수혈 모두 적은 양의 혈액이 주입 된 것이었으므로 알러지 반응에서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수혈을 받은 데니스의 세 번째 환자는 스웨덴의 귀족인 바론 본데(Baron Gustaf Bonde)라는 젊은 환자였다. 당시 본데는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프랑스 파리에서 병을 얻었고 주치의가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진단을 내린 심각한 상태였다. 때마침 그의 가족들은 데니스의 새로운 치료법에 관하여 듣게 되었고 그 방법을 진행 하고자 했다. 첫 수혈을 받은 본데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기력을 차리는 듯 했으나, 짧은 시간 동안만 그 효과가 나타났으며 두 번째 수혈을 받는 도중 사망했다. 1667년 겨울, 데니스는 정신이상을 보였던 환자인 모로이(Antoine Mauroy)에게 소의 혈액으로 세 번의 수혈을 진행했다. 이 환자가 세 번째 수혈 중 사망 했으나 모로이의 죽음은 비소 중독 때문으로 밝혀졌다. 그의 부인이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자 그녀는 그 책임을 데니스의 이런 의료 행위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파리의 많은 다른 의사들이 데니스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재판 결과, 데니스는 살인죄로 기소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결국 1668년 파리의약협회의 허락 없이는 수혈을 수행하지 못하게 됐다.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데니스는 또 한 번의 수혈을 마비 환자에게 진행했다고 하며, 재판 결과가 나온 이후로 데니스는 수혈을 하는 의료 행위를 더 이상 하지 않았고 수혈은 서서히 사람들에게 잊혀져가고 있었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Denis,The Educational Broadcasting Corporation: http://www.pbs.org, 대한적십자사)
 


그림) James Blundell
(Public domain. Freely licensed media files)

1800년대, 수혈의 초기 연구

오랫동안 금지된 수혈은 영국의 내과의사인 제임스 블런델(James Blundell)에 의해 재개됐는데, 1818년, 분만 후 출혈(postpartum hemorrhage)에 의한 산모들의 사망을 막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으로 수혈을 제안했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로, 출산 과정에서 심한 출혈로 인하여 많은 수의 환자를 잃어야만 했고 이를 개선할 방법을 찾기 위해 동물 실험을 수행했다. 분만 후 출혈 환자에게 사람의 혈액을 주입한 것이 사람의 혈액으로 사람에게 수혈한 최초의 성공적 사례였다. 제임스는 이 내용을 1818년 12월 22일, 런던 외과학 회보(Medico-Chirurgical Society of London)에 발표 했다. 그는 수혈 시 혈액이 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빠른 속도의 처치가 매우 중요하며 수혈을 받는 사람의 혈관에 공기가 유입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압력을 이용하면 빠르게 수혈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임펠러(Impellor, 압축기의 일종)라 불리는 장치 및 수혈에 필요한 장치들을 고안했고 이를 통해 압력을 이용하여 수혈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제임스의 수혈 방법이 현대 수혈 방법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제임스 블런델에 의해 사용되었던 수혈장치 (1818년)
(출처. US Army Medical department-Office of Medical History)(출처. http://en.wikipedia.org

1867, 영국인 의사 조셉 리스터(Joseph Lister)는 수혈하는 동안 감염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소독제를 사용했다.
1873-1880년, 미국인 의사들이 소, 염소 및 사람 간의 수유(輸乳), 즉, 혈액 대신 우유를 주입하는 방법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1884년에는 수유(輸乳)의 부작용으로 인해 생리 식염수가 “대체 혈액”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출처. © 2000-2005 BloodBook.com., http://www.redcrossblood.org/learn-about-blood/history-blood-transfusion)


  • 그림) Joseph Lister
    (Public domain. Freely licensed media files)

  • 그림) Karl Landsteiner
    (출처. © Nobel Media AB 2013)

1900년대, 혈액형의 발견

1901년, 오스트리아인 의사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가 사람의 세 가지의 혈액군인 A, B, O형을 발견 했다.
1907년, 미국인 병리학자 루드빅 헥토엔(Ludvig Hektoen)이 혈액 기증자와 환자 간의 혈액 교차적합 시험을 통하면 안전한 수혈을 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1914년, 구연산나트륨(sodium citrate) 같은 장기 혈액응고 방지제가 개발되어 혈액의 장기간 보관이 가능해졌다. 또한 이 시기는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시기로 전쟁 당시 사용하였던 수혈장치도 있었다.


  • 그림) 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였던 수혈 장치와 구연산나트륨
    (출처. US Army Medical department-Office of Medical History)

1939-1940년,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비너(Alexander Wiener), 레빈(Philip Levine)과의 공동 연구 결과로 Rh 혈액군을 발견했다.

1940년, 미국 정부가 국가 혈액 수집 프로그램을 개설 했다. 미국의 화학자 에드윈 콘(Edwin Cohn)이 혈장 속의 여러 가지 단백질을 분리하는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알부민, 감마글로불린 및 섬유소원을 분리하여 임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백스터사(Baxter Corporation)에서 노리스 네셋(Naurice Nesset)의 동업자였던 존 엘리엇(John Elliott)이 최초의 진공 혈액 보관용기를 개발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미국인 의사 찰스 드류(Charles Drew)의 지휘 하에 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영국인 병사들에게 혈액을 공급하는 수혈 프로그램 “Blood Plasma for Great Britain Project”가 미국에서 시작됐다.Edwin Cohn Plasma Charles Drew(출처. © Copyright 2013 The American Red Cross)


  • 그림) (출처. © Copyright 2013 The American Red Cross)


1941년, 미국 적십자가 2차 세계 대전 참전 중인 미군을 위하여 찰스 드류를 국장으로 하는 국가 혈액 기증 서비스(National Blood Donor Service)를 출범시켰다. 진주만 공격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의 쇼크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알부민이 사용됐다.
1944년, 혈장을 동결 건조시켜 보관 및 운반을 손쉽게 만든 건조 혈장(dried plasma)이 2차 세계 대전 참전 중에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필수 의약품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 그림) 세계 2차 대전 시 사용되었던 건조 혈장용 용기들

좌: 전쟁초기에 사용한 혈장용 용기들, 우: 대용량용 혈장 및 알부민 용기들

(출처. US Army Medical department-Office of Medical History)

1945년, 미국 적십자가 6백만 리터의 혈액을 수집한 제2차 세계 대전용 혈액프로그램을 마무리지었다. 영국인 면역학자 로빈 쿰스(Robin Coombs)와 동료 아더 뮤랑(Arthur Mourant) 및 롭 레이스(Rob Race)에 의해 불완전 항체를 증명하기 위한 항글로불린 검사(antiglobulin test) 또는 쿰스테스트(Coombs test)로 잘 알려진 검사법이 개발되었으며 현재까지 널리 사용 중이다.

(출처. © Copyright 2013 The American Red Cross)
 

제1차 세계 대전과 수혈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지속된 최초의 세계 대전인 제1차 세계 대전은 많은 인명을 앗아간 무서운 전쟁이었지만 수혈과 같이 인류에게 필수적인 의료적 진보도 가져왔다. 구연산나트륨(1914년) 및 헤파린(1916년) 같이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고 있는 혈액 응고제가 전쟁 중에 개발되어 혈액의 장기 보관 및 원거리 운반이 가능하게 되었고 환자 바로 옆에 헌혈하는 기증자가 없어도 수혈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혈이 여전히 실현 불가능한 의료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고정관념을 깬 이는 우연히도 로버츤(Robertson)이라는 동성을 가진 2명의 군인 장교들이었다. 한 사람은 직접 전혈 수혈을, 다른 한 사람은 장기 보관된 전혈의 수혈을 성공 및 보편화시켰다.


  • 그림) Lawrence Bruce Robertson Oswald Hope Robertson

제1차 세계 대전 중 수많은 캐나다 및 미국인 외과 의사들이 수혈의 방법을 연구 중이었는데 캐나다 군의관이었던 로렌스 브루스 로버츤(Lawrence Bruce Robertson)이 혈액 교차 시험이 되지 않은 혈액 기증자와 환자의 정맥을 직접 연결하여 빈사 상태에 빠진 수많은 환자를 살려냈다. 물론 용혈작용에 의하여 사망하는 환자가 소수 있었으나, 당시 대체 혈액으로 사용되던 생리 식염수보다 수혈이 환자를 구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낸 업적과 그가 고안해낸 “syringe-cannula 기법”으로 수혈을 간편화 한 연구(1916-1917년 보고)는 현재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17년 미군의 군의관이었던 오스왈드 호프 로버츤(Oswald Hope Robertson)은 혈액의 보관과 수혈이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오스왈드 로버츤은 다양한 기증자로부터 모아진 혈액이 혈액형 및 매독 등의 시험을 거친 후 환자에게 제공될 경우 매우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치료에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혈액 수집에 앞서 혈액 보관의 중요성에 대하여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업적은 “혈액 은행”의 시초가 됐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수혈의 혜택을 입은 영국의 왕립 육군의무부(Royal Army Medical Department)는 “세계 대전 중의 의료 역사(Medical History of the Great War)”에서 수혈과 혈액은행의 개발을 “전쟁에 의한 가장 중요한 의료 진보”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외과의사 하비 쿠싱(Harvey Cushing)은 1918년 10월 그의 노트에 “괜찮은 병원은 하루에도 50회 이상의 수혈을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두 로버츤 장교의 기여가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전혈 수혈이 보편화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출처. Transfus Med Rev. 2009 Jul;23(3):232-6)
 

인생의 90% 이상을 연구에만 몰두한 노력형 천재, 카를 란트슈타이너

란트슈타이너가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에만 몰두하며 지낸 지독하고 성실한 연구자였음은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출처. ScienceHeroes.com, © 2008-2010 94W Holdings, Inc.)

“란트슈타이너는 항상 확신에 찬 에너지를 가지고 진취적으로 연구 했다. 그는 잘 갖추어진 연구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의사나 생물학자가 아닌 화학자와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 사교적이지 않았던 란트슈타이너는 사교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 대신, 낮에는 실험에만 집중 했고 밤에는 늦은 시간까지 읽고 생각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의 무한한 에너지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대단했으며 연구실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생각해 냈으며 그 아이디어를 실험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페이톤 라오스(Peyton Rous)가 란트슈타이너에 대하여 한 말이다. 라오스는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1920년부터 라커펠트 의학 연구소에서 연구 했으며 그의 연구실은 카를 란트슈타이너 연구실의 위층에 있었다고 한다.
라오스는 또한, “란트슈타이너는 기본적으로 예리하고 철저했으며 정확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기분전환용으로 고급 수학책을 읽었고 대수학과 미적분을 즐겼으며 새로운 수리물리학을 열정적으로 따랐다.”라고 란트슈타이너에 대해 평했다.
(출처 : :ScienceHeroes.com, © 2008-2010 94W Holdings, Inc.)

“한 사람이 혼자서 모든 과학의 지식을 알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그 시대의 모든 과학적 지식을 이해하고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지적 능력을 소유한 마지막 인물이었다.”

마이클 하이델베르그(Michael Heidelberger)라는 란트슈타이너의 동료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란트슈타이너를 통해 면역학을 처음 배운 것이라고 했다. 라커펠러 의학 연구소 동료였던 필립 레빈(Philip Levine)도 란트슈타이너에 관한 인상적이었던 기억을 아래와 같이 표현 했다.

“21살에 이미 란트슈타이너는 중요한 발견은 다양한 학문의 융합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은 나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네 가지의 혈액형 중 AB형을 발견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안드리아노 스털리(Adriano Sturli)는 란트슈타이너의 혈액형 실험을 위해 혈액을 제공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란트슈타이너는 당시 이 실험을 위하여 자신의 혈액과 동료들의 혈액을 얻어 실험했었다. 스털리가 란트슈타이너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01년 연말 즈음, 란트슈타이너가 나에게 혈청학 관련 실험을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함께 일을 한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고 란트슈타이너가 만족할 때까지 그가 한 실험들을 반복했으며 이로 인해 네 번째 혈액형인 AB형을 발견하게 됐다. 1901년 12월 31일, 추가할 마지막 데이터를 위해 실험을 막 시작했고 적막한 연구소 건물에는 란트슈타이너와 나, 단둘이 쉬지도 않고 8시 반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함께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초대한 친구들이 있었기에 나는 신경이 많이 쓰이는 상황이었고 그때 나의 기분은 슬프면서도 흡족한 상태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당시의 란트슈타이너는 매우 친절하게, 그렇지만 강경하게 나에게 적혈구를 세척하거나 혈청을 섞는 등의 실험을 하도록 했다. 그 날의 실험 결과는 나에게 매우 놀라운 결과로 보였으나, 란트슈타이너에게는 마치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는 정도의 결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함께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매우 다정한 “Happy New Year”를 말하는 좋은 친구 사이이다.”

이런 여러 일화들이 있기는 하지만 란트슈타이너의 동료들은 그가 항상 그렇게 독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농담도 곧잘 하는 재치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시간이 없는 내가 너희처럼 시간이 많이 남은 젊은이들에게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은 것임을 가르쳐야 하느냐?” 라고 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란트슈타이너에게는 왈디라는 이름을 가진 개가 있었는데, 가끔 연구소에 왈디를 데려와 그의 책상 아래 앉혀 두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왈디는 어김없이 짖어댔고 그런 개를 보면서 란트슈타이너는 농담조로 왈디를 질책하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왈디야, 너는 과학에 대한 존경심을 원자 크기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구나.”

(출처. ScienceHeroes.com, © 2008-2010 94W Holdings, Inc.)

1901년 응집성에 따라 사람의 혈액형을 A, B, O 형으로 분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란트슈타이너는 32살의 나이로 수백 년간 풀리지 않았던 혈액의 비밀을 밝혀낸 끊임없이 노력하는 연구자였다. 항상 많은 수의 논문을 읽고 관련 분야가 아닌 과목의 수강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3,639구의 시신을 부검한 열정적이고 근면 성실한 연구자였고 이런 모든 연구의 과정을 통해 약 350편의 논문을 발표한 대 학자였다. 란트슈타이너가 연구에 할애한 시간은 의식이 깨어있는 시간의 90%라고 전해진다. 그의 자서전을 쓴 작가 폴 스피저(Dr. Paul Speiser)는 란트슈타이너를 ‘매우 정확하게 원인과 결과에 대해 체계적으로 진술했고 그 가설의 불명확한 부분을 어렵게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란트슈타이너는 ‘가설에 대해 소개할 때 과학적인 실험결과로 이를 뒷받침했고 늘 스스로 과학적 증명이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출처. 빌리 우드워드의 저서-미친 연구 위대한 발견,ScienceHeroes.com, © 2008-2010 94W Holding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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