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elprize-history
노벨상의 역사
nobelprize-history노벨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설립한 기금으로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여섯 분야에서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노벨이 이 상을 제정한 이유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1888년에 노벨의 형이 사망했을 때 프랑스의 신문들이 그를 형과 혼동하면서 내보낸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제목의 지사를 본 뒤 충격을 받아 죽은 뒤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제정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노벨이 설립한 상이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분야에 대한 평생에 걸친 그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상의 설립과 관련해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평화주의자 베르타 폰 주트너와의 교분이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노벨의 사망 5주기인 1901년 12월 10일부터 상을 주기 시작했으며, 경제학상은 1968년 스웨덴 은행에 의해 추가 제정된 것으로 1969년부터 수여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은 유언장에서 스톡홀름에 있는 스웨덴 왕립과학원(물리학과 화학), 왕립 카롤린스카 연구소(생리의학), 스웨덴 아카데미(문학), 그리고 노르웨이 국회가 선임하는 오슬로의 노르웨이 노벨위원회(평화)를 노벨상 수여 기관으로 지목했다. 노벨 평화상만 노르웨이에서 수여하는 이유는 노벨이 사망할 당시는 아직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분리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상은 1968년에 스웨덴 중앙은행이 설립 300주년을 맞아 노벨 재단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면서 재정되어 1969년부터 시상해 왔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경제학상 수상자 선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며 수상자 선정과 수상은 다른 상들과 마찬가지로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주관하고 있다. 그 직후 노벨 재단은 더 이상 새로운 상을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노벨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노벨 재단은 기금의 법적 소유자이자 실무담당 기관으로 상을 주는 기구들의 공동 집행기관이다. 그러나 재단은 후보 심사나 수상자 결정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며, 그 업무는 4개 기구가 전담한다. 각 수상자는 금메달과 상장, 상금을 받게 되는데, 상금은 재단의 수입에 따라 액수가 달라진다.

노벨상은 마땅한 후보자가 없거나 세계대전 같은 비상사태로 인해 정상적인 수상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는 보류되기도 했다. 국적, 인종, 종교, 이념에 관계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으며, 공동 수상뿐 아니라 한 사람이 여러 차례수상하는 중복 수상도 가능하다. 두 차례 이상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마리 퀴리(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를 비롯하여 존 바딘(1956년과 1972년 물리학상), 프레더릭 생어(1958년과 1980년 화학상), 그리고 라이너스 폴링(1954년 화학상, 1962년 평화상)이 있으며, 단체로는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이 1954년과 1981년 두 차례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국제 적십자위원회는 1917년과 1943년, 1966년 세 차례 노벨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을 거부한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개인의 자발적인 경우와 정부의 압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1935년 당시 독일의 정치범이었던 반나치 저술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평화상 수여한 데 격분해 향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이에 따라 리하르트 쿤(1938년 화학상)과 아돌프 부테난트(1939년 화학상), 게르하르트 도마크(1939년 생리·의학상)는 강제로 수상을 거부하였다. 그 외에도 『닥터지바고』로 195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그 소설에 대한 당시 구소련 대중의 부정적인 정서를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으며, 1964년 문학상 수상자 장폴 사르트르와 1973년 평화상 수상자인 북베트남의 르둑토는 개인의 신념 및 정치적 상황을 이유로 스스로 노벨상을 거부했다.

노벨상은 지금까지 6개 분야에서 106년 동안 785회 수여되었으며, 개인은 766명, 단체는 19곳에 수여되었다. 하지만 여성 수상자는 766명의 개인 수상자 중 단 33명뿐이다.